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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 목 한,중,일 삼국의 실체
    작 성 자 arirang 등록날짜 2017-04-28 10:58

     


    공자가 노나라 242년의 역사를 편년체로 기록하여 <춘추春秋>로 이름 지었는데, 이 책은 주나라 왕실을 종주로 삼는 대일통(大一統) 사상과 존왕양이(尊王攘夷)의 정신을 표방하고 있다. 그 후 중국 사서들은 이 <춘추>를 역사 서술의 표준으로 삼게 되었는데, 중국 역사서의 편찬 원칙은 다음 세 가지의 ‘춘추필법春秋筆法’으로 요약된다.
     
    중국에 영광스런 일은 한껏 부풀려 쓰면서 수치스런 일은 감추고(爲國諱恥)

    중국은 높이면서 주변 나라는 깎아내리고(尊華攘夷)

    중국사는 상세히 쓰면서 이민족 역사는 간략하게 적는다(祥內外)
     
    춘추필법은 표면적으로는 대의명분을 밝혀 세우는 역사 서술법이지만, 사실은 중국이 천하의 중심이라는 중화주의에 충실한 필법이다. 사마천 이하 역대 중국의 사가들의 잘못된 춘추필법을 지적한 것은 단재 신채호선생이다. 그는 [조선사연구초]<전후삼한고前後三韓考>에서 중국 역사의 비조로 일컬어지는 사마천을 “공자 춘추의 존화양이, 상내약외, 위국휘치 등의 주의를 굳게 지키던 완유頑儒”라고 혹평하였다.

     

     

     

     

     

    한국과 중국의 고대사를 날조한 기록상의 첫 인물은 지금으로부터 2,100년 전 한漢나라 무제(武帝) 때의 사관史官인 사마천이다. 사마천은 한무제(漢武帝, BC156년~ BC87년) 전쟁에 참패하고 돌아온 시기에, <사기史記>를 저술하였다.

     

    사마천은 [사기]<본기本紀>에서 고조선이라는 호칭을 전혀 쓰지 않았다. 그런데 제후국의 역사를 다룬 <세가世家>에서 ‘봉기자어조선(封箕子於朝鮮)’ 이라 하여 갑자기 조선(古朝鮮)이란 이름을 썼다.

    3,100여 년전, ‘기자箕子를 고조선의 왕에 봉하였다’는 것이다. 이것을 근거로 중국의 역사가들은 대한민국의 역사가 약 3,100년 전 중국의 제후국이었던 기자조선(箕子朝鮮)에서 시작된 것으로 정의한다.

     

    기자(箕子)는 비간(比干), 미자(微子)와 더불어 당시 상(商, BC1600~ BC 1046)나라의 삼현(三賢)이었다.

     

    우리가 성질이 포악한 사람을 일컬어‘ 걸주(桀紂) 같은 놈’이라고 말한다. 걸桀과 주紂는 각각 하(夏, BC2070~ BC1600)나라와 상商(은殷, BC1600~ BC1046))나라를 망하게 한 임금들이다. 주지육림(酒池肉林), 도탄지고(塗炭之苦),포락지형(炮烙之刑)이라는 고사성어(故事成語)는 그들 때문에 생겨난 것이다.

     

    폭군의 대명사로 불리는 하(夏)나라 마지막 임금 걸(桀)은 애첩 말희(抹嬉)에게 빠져 백성들에게는 가렴주구(苛斂誅求)를 일삼다 중국 최초의 명재상 이윤(伊尹)의 보필을 받은 성탕成湯,BC1600~BC1589재위)에 의해 멸망 당했다. 그리고 은(殷)나라의 마지막 임금 주(紂,BC1075~BC1046재위)는 희대의 요녀 달기(妲己)에게 빠진 후 주색을 일삼다 주(周)나라 무왕에게 멸망 당한다.

     

    비간比干은 상(商,은殷)나라의 마지막 군주였던 폭군[暴君] 주왕(紂王)에게 정치를 간하다가 사형되었고, 미자(微子)는 비간比干의 죽음을 보고 멀리 도망쳤다. 기자箕子는 거짓으로 미친 척하다가 왕의 미움을 사 감금되었다.

     


    BC 2세기경, 복생(伏生)의 상서대전(尙書大傳)>과 사마천의 <사기史記> 등에서 전하는 기자조선의 내력은 이러하다.

     

    주(周,BC 1046 ~ BC256)나라의 건국자 무왕이 상나라를 멸망시키고, 감옥에 감금되어 있던 기자箕子를 풀어 주었다. 이때 기자箕子는 주나라에 의해 풀려난 부끄러움을 참을 수 없어 조선으로 떠나버렸다. 이 소식을 들은 무왕이 그를 조선 왕으로 봉하였다는 것이다. 그런데 제후로 봉해진 이후의 이야기는 서로 다르다.
     

    복생(伏生)의 <상서대전>은 기자箕子가 책봉을 받은 후 신하의 예를 행하기 위해 주周나라를 찾아가 무왕에게 홍범구주에 대해 설명하였다고 한다. 반면 사마천의 <사기史記>는 기자箕子가 책봉을 받았지만 ‘주나라의 신하가 되지는 않았다(而不臣也)’라고 기록하였다.

     

    ‘기자箕子를 제후로 임명했다’는 말 바로 다음에 ‘신하로 삼지는 못했다’는 모순된 말을 하고 있는 것이다. 제후가 되면 당연히 신하가 되는 것인데도 그와 상반되는 말을 하는 것이 아닌가. 결론적으로 기자箕子라는 인물이 고조선의 왕으로 봉해진 역사적 사실은 전혀 없었다.

     

    여기서 한 가지 주목할 것은 ‘기자箕子가 조선으로 떠나버렸다(走之朝鮮)’는 구절이다. 이것은 동방 땅에 그전부터 단군조선(檀君朝鮮)이 자리 잡고 있었음을 천명하는 내용이다.

     

    기자가 망해 버린 고국을 떠나 이웃나라 조선으로 망명할 수 있었던 것은 이미 오래전부터 단군조선(檀君朝鮮)이 존재하였기 때문이다. 중국이 기자조선을 내세워 단군조선을 숨기려 하였으나, 오히려 더 드러내는 결과가 되었다. 결론적으로 기자조선은 한민족사를 중국사에 예속된 역사로 만들기 위해 중국이 날조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기자箕子는 고조선 서쪽 변두리를 맴돌았을 뿐 한반도 지역으로 넘어 온 적이 없건만, 고려 때 송나라 사신이 “그대 나라에 기자箕子의 묘가 어디 있는가?”라고 묻자, 아무도 대답하지 못하였다.

     

    그 후 고려 숙종 7년(1102) 예부상서 정문(鄭文)이 무주고총(無主古塚)을 하나 찾아 임금께 청하여 서경(평양)에 가짜 기자묘(箕子墓)와 기자 사당을 만들었다. 또한 서경의 반듯한 도로 흔적들을 기자(箕子)가 만들었다는 정전제(井田制)의 증거로 간주하였다. 하지만 1960년대 기자 정전터와 평양 을밀대 북쪽에 있던 기자묘를 조사하면서 그 허구가 밝혀졌다. 기자 정전터는 고구려시대 도시 구획 흔적이었고, 기자묘에서는 사기 파편과 벽돌조각만 나왔다.

     

     

     

     

     

    국 산동성 조현에서 서남쪽으로 약 15Km 정도 가면 왕성두촌이라는 작은 마을이 나온다. 그 마을 들판 한가운데에 작고 초라한 모습의 기자箕子의 묘가 있다.

     

    기자箕子에 대한 진실은 그는 무왕에 의해 풀려난 후 상나라 유민을 이끌고 당시 단군조선(번조선)의 국경지역인 산서성 太原으로 이주하였다. 망명지 단군조선의 번조선 땅에서 6년 정도 살다가가 고향 서화로 돌아가 생을 마감하였다.

     

    일본은 우리역사의 출발을 ‘위만조선’으로 말한다.
     
    조선은 본래 독자적으로 나라를 건설한 것이 아니라, 중국의 식민지인 ‘위만조선’에서 시작되었다는 것이다. 그들의 주장대로라면 위만조선이 BCE 194년부터이니까, 조선의 역사는 약 2,200년 밖에 안 되는 것이다. 우리역사학계에서 우리 민족 최초의 국가라고 주장하고 있는 위만조선(衛滿朝鮮: BC 194~ BC 108) 의 실체는 과연 무엇인가?  
     

    위만(재위 BCE 194~BCE 180)은 본래 중국 한족 출신으로 한나라를 세운 유방의 죽마고우였던 노관의 부하이다.

     

    중원을 평정한 한 고조는 여태후와 더불어 개국공신들을 대대적으로 숙청하였다. 이 때 연나라 왕 노관은 흉노로 달아나고, 위만은 조선인으로 변장한 뒤 부하 1천 명과 함께 왕검성에 와서 번조선의 준왕(기준箕準, BC 221~ BC 194)에게 거짓 투항을 했다. 이에 준왕은 덕으로써 그를 받아주고 서쪽 변경을 지키는 수비대 책임자로 임명까지 했다. 그러나 그 곳에서 한족 망명 집단을 이끌고 몰래 세력을 기른 위만은 이듬해 준(기준箕準)왕을 배반하고 왕검성을 쳤다. 그리고 나라 이름은 그대로 둔 채 스스로 왕이 되었다(BCE 194).

     

    조선(BC 2333~ BC 238)은 신교문화(神敎文化)의 삼신사상(三神思想)을 바탕으로 조화신(造化神), 교화신(敎化神), 치화신(治化神)의 원리에 따라 고조선을 삼한(三韓)으로 나누어 다스렸다.
     

    진한(辰韓)은 단군의 직할통치 지역이었고, 나머지 마한(馬韓)과 번한(番韓)은 부단군을 두어 간접 통치를 했다. 진한(홍산 적봉 일대), 마한(한반도 일대), 번한(산동반도 일대)의 삼한(三韓)을 22대 색불루(索弗婁,BC 1285~ BC 1238) 단군 때 삼조선 즉, 막조선, 진조선, 번조선으로 변경하였다. 
     

    위만(衛滿,BC 194)이 강탈한 땅은 번조선(番朝鮮)의 부단군 준왕(準王), 기준(箕準, BC 221~ BC 194)이 통치했던 곳이었다.
     

    『삼국유사』에서 말한 위만조선은 삼조선(三朝鮮) 중, 서쪽 영토였던 번조선(番朝鮮: 산동성 일대)의 한 모퉁이를 잠깐 강탈하여 지배했던 위만정권에 불과하다. 신채호(1880∼1936) 선생은 ‘그것은 우리의 변방 침략사로 다루어야 한다’고 말했다. 그런데 현 역사학계에서는 자기에게 은혜를 베풀어 준 준왕準王을 잡아먹은 위만 같은 배은망덕한 자가 고조선의 정통을 계승하였다는 것이다.
     

     

     

     

     

     

    사마천의『사기』에도 분명히 위만을 연나라 사람[燕人]이라고 기록했을 뿐 아니라, 안정복(1712∼1791)의『동사강목』에서는 ‘위만은 나라를 찬탈한 도적’이라 했고, 임시정부 국무령을 지낸 석주 이상용은 ‘위만은 한 명의 강도에 불과하다[乃一强盜]’고 하였다.

     

    이처럼 위만은 중국 한족의 인물로서, 한마디로 은혜를 원수로 갚은 배은망덕한 떠돌이 도적인 것이다.

     

     

    그러면 고조선의 역사에 대해, 지금의 교과서에서는 어떻게 가르치고 있는가?

    위만조선이 단군조선을 계승했다’고 이야기한다. 천하에 불의한 위만이란 자가 번조선의 왕위를 찬탈하고 정권을 잡은 것인데, 그가 단군조선의 국통을 계승했다는 것이다. 참으로 정신 나간 역사가 아닐 수 없다.

     

     

     

     

     

     

    <중국 역사학자들의 잘못된 시각을 지적한 중국 초대총리 주은래>


    1963년 6월28일 주은래周恩來 총리는 조선과학원 대표단 접견시 중국과 조선의 관계에 대해 다음과 같이 언급했다.


    중국과 조선, 두 민족 관계는 제국주의 침략으로 중지 될 때까지 3, 4천년 이상 매우 긴 시간이었다. 이러한 역사연대에 대한 두 나라 역사학의 일부 기록은 진실에 그다지 부합되지 않는다. 이것은 중국역사학자나 많은 사람들이 대국주의, 대국쇼비니즘의 관점에서 역사를 서술한 것이 주요원인이다. 그리하여 많은 문제들이 불공정하게 쓰여졌다.

     

    먼저 양국민족의 발전에 대한 과거 중국 일부 학자들의 관점은 그다지 정확한 것은 아니었고 그다지 실제에 부합하지 않았다.


     조선민족은 조선반도와 동북대륙에 진출한 이후 오랫동안 거기서 살아왔다. 요하(遼河), 송화강(松花江)유역에는 모두 조선민족의 발자취가 남아있다. 이것은 요하와 송화강 유역, 도문강(圖們江)유역에서 발굴된 문물, 비문 등에서 증명되고 있으며 수많은 조선문헌에도 그 흔적이 남아있다. 조선족이 거기서 오랫동안 살아왔다는 것은 모두 증명할 수가 있다.

     

    경백호 부근은 발해(渤海)의 유적이 남아있고, 또한 발해의 수도였다. 여기서 출토된 문물이 증명하는 것은 거기도 역시 조선족의 한 지파(支派)였다는 사실이다. 이 나라는 역사적으로 상당히 오랫동안 존재했다. 따라서 조선족이 조선반도에서 살았을 뿐만 아니라 동시에 요하, 송화강 유역에서도 오랫동안 살았다는 것이 증명된다.…

     

    우리 중국은 항상 봉건대국의 태도로 당신들을 무시 모욕하면서… 어떤 때는 고대사를 왜곡했고, 심지어 여러분들의 머리위에 조선족은 “기자자손(箕子之后)” 이라는 말을 억지로 덧씌우고, 평양에서 그 유적을 찾아 증명하려는 무리한 시도를 하기도 했다. 이것은 역사 왜곡이다. 어떻게 이렇게 될 수가 있단 말인가? 
     

    어떤 일에 대해서는 우리가 책임질 일이 아니고 조상들의 몫이다. 그렇지만 당연히 이런 현상은 인정해야만 한다. 이렇게 된 이상 우리는 당신들의 땅을 밀어부쳐 작게 만들고 우리들이 살고 있는 땅이 커진 것에 대해 조상을 대신해서 당신들에게 사과해야 한다. 그래서 반드시 역사의 진실성을 회복해야한다. 역사를 왜곡할 수는 없다. 도문강, 압록강 서쪽은 역사이래 중국땅이었다거나, 심지어 고대부터 조선은 중국의 속국이었다고 말하는 것은 황당한 이야기다.

     

    중국의 이런 대국쇼비니즘이 봉건시대에는 상당히 강했었다. 다른 나라에서 선물을 보내면 그들은 조공이라 했고, 다른 나라에서 사절을 보내 서로 우호교류할 때도 그들은 알현하러 왔다고 불렀으며, 쌍방이 전쟁을 끝내고 강화할 때도 그들은 당신들이 신하로 복종한다고 말했으며, 그들은 스스로 천조(天朝), 상방(上邦)으로 칭했는데 이것은 바로 불평등한 것이다. 모두 역사학자 붓끝에서 나온 오류이다. 우리를 이런 것들을 바로 시정해야 한다. 그래서 나는 중국 문화와 역사를 이해하는 여러분들 과학원 분들이 중국과 조선관계사 문제에 대해서 공동으로 연구하면서 우리의 잘못을 지적해 주기를 바라고 있다…중략

     

     

    중국과 일본이 왜곡한 우리 역사의 결론은 ‘한반도의 북쪽은 한사군에 의한 중국의 식민지로, 남쪽은 임나일본부에 의한 일본의 식민지 역사로 시작되었으므로 한국의 역사는 청동기 역사로 봐도 기껏해야 한 2,700년, 3천년을 넘을 수가 없다.’는 것이다.

     

    일본이라는 국가가 성립된 것은 친정집 백제가 망하고 난 10년 뒤, 670년이다. 국가 성립사 1,300년을 두 배로 잡아 늘려서 2,600년이라고 당당하게 외치는 것이다. 그러면 중국은 몇 년인가?

     

    중국사를 들어가 보면 전통적으로 신화, 전설, 왕조시대, 이렇게 셋으로 나눠서 기술하고 있다.

     

    신화, 전설은 삼황오제(三皇五帝)시대다. 문제는 삼황(三皇)시대가 있었다는 것이다. 중국 역사의 근원은 삼황三皇이다. 그래서 이 황皇과 제帝를 따서 중국사 최초로 황제(皇帝) 자리에 오른 사람이 약 2,200년 前 진시황이다. 진秦나라 시황제가 처음 황제의 자리에 앉았다. 그런데 그들은 역사를 기록할 때 앞에 있는 삼황(三皇,태호복희, 염제신농, 황제헌원)과 삼제(三帝, 소호금천, 전욱고양, 제곡고신)는 쓸 수가 없었다.

     

     

    왜?

     

    그 역사는 모두가 동이족의 역사다. 동방 한민족의 역사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서오경에 나오는 유가의 역사관을 보면, 항상 ‘요순우탕문무주공(堯舜禹湯文武周公)’이다.

     

    요임금의 당나라, 그다음에 순임금의 우나라, 그리고 하상주夏商周, 하나라 우임금, 상나라 탕임금, 그리고 주나라를 연 문왕과 무왕. 그러던 중국이 공산정권이 들어서자

     

    ‘야, 우리의 역사, 국가 성립사는 어디부터냐?’하는 걸 묻기 시작했다. 그래서 1996년부터 2000년까지 4년 동안 하상주 단대공정(斷代工程)을 했다. 역사학, 고고학, 천문학 등의 연구 방법을 종합하여 서기전 841년 이전의 하夏, 상商, 주周 시대의 연표를 확정하고, 그동안 전설로 여겨 온 하나라 상나라 주나라 역사를 실제 중국 고대 왕조사로 만든 것이다. 요순(堯舜)을 물고 들어가 ‘이것이 실제 중국의 고대 왕조국가 시대다.’라고 했는데, 역사 개혁을 하면서 자신감이 붙었다.

     

    사마천 『사기』 첫 페이지에 등장하는‘4,700년 전의 황제헌원이 우리 한족漢族의 시조다.’라고 했다. 그런데 문제는 여기서 끝난 게 아니라는 것이다. 그보다 500년 이전 동방 배달국의 성인인 ‘동양 의학의 아버지, 농경의 아버지, 시장문화의 아버지인 염제신농(BCE 3218 ~ BCE 3078)씨도 한족의 조상이다.’ 또 여기서 더 비약을 해서 5,600년 전, 동방 문화의 원 주인공이던 한민족의 조상 태호복희(BCE 3528 ~ BCE3413)씨. 지금 우리나라 태극기의 괘,‘팔괘를 처음 그린 태호복희씨도 중국의 조상이다.’라고 했다. 현재 중국은 고구려, 발해, 그 이전의 고조선 역사까지 중국사로 흡수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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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댓글 2
  • zasmin77 [ 2017-04-28 15:23:59 ]
  • 아~~ 중국은 북한까지 다 잡아 먹을려구하는 속셈이고 미국은 자국의 이익을 위해 사드배치 강행하고 사드 비용 1조 1300억 요구하네... 내일 토요일에는 또 촛불집회에 나아가 목 놓아 소리쳐야 하네~~
  • mokininsoo [ 2017-04-29 19:53:45 ]
  • 중국의 과거 대학자들도 동북공정의 부당함을 스스로 안다. 그러나 이제 그 지성인들마저 다 죽어 없고 몇 남아 있지 않다. 중국은 대국굴기를 꿈꾼다. 알면서도 타국가들의 역사를 날조한다. 중국은 외적으로 지구상 양강구도의 대국을 이룰지 모르나 내적으로 사상누각의 철학으로 붕괴하고 말 것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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